광복 이후 80년 동안 우리 경제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 온 중앙은행의 역사에도 명암이 존재했다.
한반도에 처음 들어선 중앙은행은 1909년 일본이 세운 ‘한국은행(이후 조선은행)’이다. 조선은행은 중앙은행의 역할은 수행했지만 실제론 일본의 한반도 지배와 대륙 침략에 필요한 자금 공급 등 수탈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태평양전쟁 때는 국채를 마구 찍어내 국내 경제에 장기적인 타격을 줬고, 광복 직후 일본정부 철수에 맞춰 은행권을 남발해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 수년간 한국경제는 혼란에 빠졌다. 미군정 및 과도정부는 조세징수를 통한 재원 조달이 사실상 어려웠기 때문에 통화증발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금융기관의 무분별한 여신 취급을 통제할 여건도 갖추지 못했다. 혼란을 수습하고 국제사회에서 신용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통화신용정책 권한을 가진 현대적인 중앙은행 설립이 필요했다.
1950년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한국은행법은 이런 시대적 요구에 따라 통화가치 안정, 금융 민주화, 정치적 중립성 보장이라는 중앙은행제도의 이념을 반영해 한은이 통화신용정책을 수립·집행하고 은행 감독 및 외국환업무를 담당하도록 했다. 같은 해 6월5일 초대 총재로 구용서 옛 조선은행 총재가 임명되며 한국은행은 닻을 올렸다.
중앙은행은 역사 속에서 위기를 맞기도 했다. 1962년 박정희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로 출범한 새 정부는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중앙은행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 외환정책기능은 정부로 이관됐고, 인사·예산에 걸쳐 한은의 독립성이 크게 후퇴했다. 1980년대 초까지도 한은은 빈번한 정부대출로 독자적인 통화정책 기능이 마비된 상태였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중앙은행이 정부 재정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줄이고 물가안정 정책을 펼 수 있도록 독립성 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1997년 외환위기를 지나며 금융개혁 과정에서 한국은행법에 중립성 조항이 신설됐고, 정부가 가지던 각종 인사·검사권한도 축소되면서 한은은 지금의 위상을 되찾았다.
2010년대 이후 한국경제를 둘러싼 대내외적 환경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자유시장경제 체제는 퇴조하고 글로벌 불확실성은 상시화됐고, 가상자산과 스테이블코인의 등장은 한은의 기능이 근본적으로 변화할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한국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저출생·고령화,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도 중요해지면서 싱크탱크로서 한은의 역량도 주목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