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권자들의 요구와 함께 매니페스토는 발전했습니다.”
지난 15일(현지시간) 영국 남서부 엑서터의 한 카페에서 만난 데이비드 새커리(사진) 엑서터대 역사학과 교수는 1900년대 초 150단어에 불과했던 선거 공약집이 1997년엔 수만 단어로 늘어난 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1918년 이후 영국 선거공약을 연구한 ‘약속의 시대: 20세기 영국의 선거공약’의 저자이기도 한 그는 근대 영국 매니페스토 변화를 연구한 역사학자다.
그는 1918년 이후 영국 선거공약을 분석했다. 새커리 교수는 “전쟁이 많은 걸 바꿔놨다”며 “정부 지출이 크게 늘고 국민의 기대치가 달라졌다. 정당들도 이때 본격적으로 조직화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후 정부도 후보자들에게 선거자금을 지원하면서 매니페스토가 대중에게도 널리 읽히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매니페스토는 당 대표가 지역구 유권자에게 보내는 짧은 연설문에서 출발했다.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정부 전체의 청사진을 담은 방대한 문서로 변했다. 이후 각 정당의 정책위원회가 구성되고, 집권당은 총리실 정책단 중심으로, 야당은 그림자 내각과 산하 위원회 등을 통해 방대한 매니페스토 작업에 돌입하게 됐다.
새커리 교수는 “공약이 길어지는 건 정책이 더 세분된다는 뜻”이라면서도 “최근 들어 약속의 이행만큼이나 어떻게 표현하느냐도 중요해졌다”고 했다. 특히 “소셜미디어 시대에는 모든 기록이 남는다. 함부로 빈말할 수 없다 보니 오히려 확정적 약속을 꺼리게 된 경향도 있다”고 분석했다.
새커리 교수는 마거릿 대처와 토니 블레어 전 총리를 근대 매니페스토 역사의 분기점으로 꼽았다. 그는 “대처는 1979년 첫 매니페스토에서 ‘지금까지 정부가 너무 많은 약속을 남발했다’고 선언하며 공약을 줄이고 집중화했다”고 평가했다.
과거 영국은 서점에서 공약집을 판매했지만, 이제는 보기 힘들다. 지난 17일 런던 시내에 있는 영국 최대 규모의 워터스톤스 서점과 영국 내 가장 오래된 해처드 서점 어디에서도 공약집을 찾을 수 없었다.새커리 교수도 “디지털로 전환되면서 사람들이 미디어를 통해 공약을 단편적으로 접하고 전문을 읽는 사람은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매니페스토가 여전히 중요하다고 했다. 새커리 교수는 “매니페스토는 유권자와의 소통 도구”라며 “앞으로 국제 비교 연구와 인공지능 기술 활용, 시민 참여 확대가 새로운 과제”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