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릿쿄대에도 윤동주 시비… “패전 80년, 반성과 평화의 주춧돌 되길” [특파원+]

연세대, 교토 도시샤대 이어
시인 수학한 세 학교에 한글 시비

“일본 잘못으로 희생된 이들 기억
정의의 시가 역사인식·반성 이끌길”

‘서시’, ‘별 헤는 밤’ 등의 작품을 남긴 일제강점기 저항시인 윤동주(1917∼1945)의 시비(詩碑)가 일본 도쿄 릿쿄대에 세워졌다. 이로써 시인이 수학한 연세대(당시 연희전문학교), 릿쿄대, 교토 도시샤대 모두에서 한글로 적힌 그의 시를 볼 수 있게 됐다.

 

11일 일본 도쿄 릿쿄대에서 제막한 윤동주 시비. 

지난 11일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제막한 시비는 릿쿄대 서쪽 14호관 인근에 설치됐다. 비석 위에는 올해 80주기를 맞은 시인의 릿쿄대 당시 생활을 설명한 짧은 글, 시인 사진, ‘쉽게 씌어진 시’와 일본어 번역이 담긴 동판이 놓였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니시하라 렌타 일본 릿쿄대 총장이 11일 교내에 설치한 윤동주 시비 제막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윤동주는 릿쿄대 재학 중 순수하고 서정적인 시를 썼다. 백합 문양이 있는 릿쿄대 편지지에 적은 시 5편의 원본은 연세대 윤동주기념관에 보존돼 있다. 

 

니시하라 렌타 릿쿄대 총장은 이날 제막식에서 “윤동주가 일본 유학 중에 남긴 시는 거의 상실됐는데, 그가 친구에게 맡긴 시 5편은 기적적으로 남았다”고 했다. 시비를 이곳에 설치한 이유에 대해서는 “윤동주는 재학 시절 사제들과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며 “사제들 숙소와 강의실 사이의 이 길을 자주 걸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11일 일본 릿쿄대에서 윤동주 시비 제막식을 집전한 사제는 “부디 이 기념비가 릿쿄대의 평화의 주춧돌이 되게 해 달라”며 “우리가 과거 역사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으며, 모든 전쟁과 폭력에 대해 눈을 뜨고 목소리를 높이며, 당신의 평화의 도구가 되기 위한 기념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원했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이듬해 4월부터 반년간 릿쿄대에서 공부했다. 10월 도시샤대로 편입해 한글 시 창작 활동을 이어가던 중 1943년 조선 독립을 논의하는 유학생 단체에서 활동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 1945년 2월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릿쿄대 뿌리는 성공회 선교사가 세운 학교다. 예배 형태로 진행된 이날 제막식을 집전한 사제는 이렇게 기도했다.

 

“태평양 전쟁의 패전으로부터 80년을 맞이한 이 때, 저희는 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희생된 모든 이들을 기억하며, 특히 시인 윤동주를 마음에 새깁니다. 부디, 윤동주 시인이 릿쿄대학교에서 수학한 사실이 이 대학의 역사 속에 영원히 기억되게 하시고, 그가 남긴 정의의 시를 통해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깊은 반성을 배우게 하소서.”

 

11일 일본 릿쿄대에서 제막한 윤동주 시비에서 관계자들이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혁 주일 한국대사, 윤동섭 연세대 총장, 윤동주 조카인 윤인석 성균관대 명예교수, 니시하라 렌타 릿쿄대 총장, 후쿠다 히로아키 릿쿄학원 이사장, 고하라 가쓰히로 도시샤대 학장.

이날 제막식에는 윤동섭 연세대 총장, 코하라 가츠히로 도시샤대 학장도 참석했다. 이들은 제막식 전 간담회에서 “순수하고 자유롭고 평화를 사랑하는 윤동주의 정신을 같이 기리는 일을 하자는 논의를 했다. 오늘 제막식을 계기로 윤동주의 정신을 우리 후학들이 이어나갈 수 있는 귀한 일들을 앞으로 함께 해 나가겠다”고 윤 총장은 전했다.

 

윤동주 시인의 조카인 윤인석 성균관대 명예교수(오른쪽) 부부가 11일 일본 도쿄 릿쿄대 이케부쿠로캠퍼스의 릿쿄학원 전시관에서 열리고 있는 ‘서거 80년 윤동주의 세계’ 기획전을 둘러보고 있다. 이 전시는 오는 25일까지 열린다.

윤동주 시비나 기념비는 그간 도시샤대가 있는 교토에 주로 세워졌다. 도쿄에 건립된 것은 시인의 서거 80주기이자 한·일 수교 60주년인 올해가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시인의 조카인 윤인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이날 유족 대표로 제막식에 참석해 “큰아버지의 릿쿄 시기는 고향과 조국을 떠나 일본의 낯선 풍경과 사람들 속에서 시인으로서 한층 성숙해지는 시기였다”며 “이제 일본에서 시인 윤동주를 기리는 물리적 터전은 모두 마련됐다. 이 비석에 새겨진 시와 안내문을 읽는 모든 이들이 큰아버지의 뜻과 시비를 세운 분들의 염원을 함께 느끼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