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가 본 경기 양평 메덩골 정원/총면적 6만평에 한국정원·현대정원 조성/1차 한국정원 9월1일 정식 오픈/세계적인 건축가·정원가 대거 참여/한국 문화·전통+니체 철학 결합 눈길/승효상 건축가, 안동 병산서원 현대적 재해석한 걸작 ‘선곡서원’ 설계

계곡을 따라 흐르는 시원한 물줄기. 번잡한 마음 순식간에 씻어내는 장쾌한 파열음으로 내달리다 굴곡진 땅 만나 어머니 품 같은 넉넉한 연못을 이뤘다. 마침 날이 푸르러 하늘, 구름, 고풍스러운 정자까지 수채화처럼 데칼코마니로 담는다. 여름은 여름인가 보다. 가만히 서 있어도 등줄기로 흐르는 땀 훔치러 잠시 그늘진 작은 한옥 툇마루에 앉았다. 파청헌(把靑軒). 푸르름을 잡는 집이라니. 이름 한번 잘 지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오로지 푸르른 하늘과 산. 메덩골정원 담장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 즐기며 눈으로 푸른 산 잔뜩 움켜쥐자 자연의 생동감은 혈관을 타고 흘러 온몸을 초록으로 물들인다.


◆정원에 심은 민초의 삶
동요 ‘고향의 봄’. 영화 ‘서편제’의 남도 돌담길과 진도아리랑. 서낭당 나무의 전설과 빨래터. 선비들의 풍류 담긴 정자. 낭랑한 글 읽는 소리 가득한 서원. 베푸는 삶을 산 경주 최부자. 매표소를 통과하자 한국의 아름다움들을 대표하는 단어들이 줄줄이 쏟아진다. ‘진짜 한국정원’을 만든다더니 ‘진심’을 제대로 담은 것 같다. 2021년 메꽃이 흐드러지던 경기 양평군 양동면에서 첫 삽을 뜬 메덩골정원이 4년 만에 완성됐다. 우선 한국정원이 9월1일 첫선을 보인다. 이로재 대표 승효상(건축가) 등 국내외 세계적인 건축가와 정원가들이 참여해 치열한 기획과 섬세한 손길 끝에 탄생한 메덩골정원은 전체 규모 20만㎡(약 6만평)에 달하며 한국정원은 그중 7000평 규모다. 한창 공사 중인 현대정원은 내년에 속살을 보여줄 것으로 보인다.

메덩골정원은 꽃과 나무를 즐기는 단순한 정원과 거리가 멀다. ʻ한국적인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문화와 전통을 찾아낸 뒤 이를 니체의 철학과 접목하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정원을 꾸미고 건축물을 세웠다. 따라서 정원이라기보다는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삶을 아우르는 박물관이자 미술관에 좀 더 가깝다.
정원 설계에 참여한 이들의 면면이 엄청나다. 프랑스 세리쿠르 정원 오너인 조경가 기욤 고스 드 고르가 프랑스 정원의 기법으로 디자인했고, 영국 활동 정원가 사바티노 우르조가 원예를 담당했다. 또 자연친화적인 미니멀리즘 건축으로 알려진 칠레 건축가 마우리시오 페소, 소피아 본 에릭사우센 부부가 니체의 철학을 주제로 건물을 디자인했고, 땅과 교감하는 건축을 추구하는 스페인 건축회사 앙상블 스튜디오는 비지터 센터를 맡았다.

특히 승효상 건축가가 경북 안동 병산서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선곡서원을 설계했는데, 벌써 한국 건축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 탄생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주차장 옆으로 흐르는 계곡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기암괴석과 장쾌하게 흐르는 물이 어우러지는 제법 큰 규모의 계곡은 아무리 봐도 원래 있던 자연계곡 같지만 사실 인공으로 만들었다. 25t 트럭 300대 분량의 자연석으로 계곡을 조성했는데 길이가 무려 400m에 달한다. 물은 끝에서 지하로 연결된 관을 통해 상류로 옮겨져 계속 순환한다니 시작부터 스케일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한국정원은 크게 세 구역으로 구성됐으며 가장 먼저 ‘민초들의 삶’ 정원을 만난다. 입구에 탐스러운 개복숭아가 주렁주렁 달렸고 봄이면 수줍으면서도 화려한 붉은 꽃을 피우는 살구나무와 진달래도 빽빽하다. 이원수 작사, 홍난파 작곡 동요 ‘고향의 봄’ 가사에 등장하는 복숭아꽃, 살구꽃, 진달래가 민중을 대표하는 꽃이라는 점에 착안했다. 개복숭아 터널을 지나면 벼락 맞은 회화나무로 꾸민 서낭당과 너럭바위가 펼쳐진 메덩내를 만난다. 김홍도의 그림 ‘빨래터’에 등장하는 풍경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다. 계곡물에는 1급수에서 서식하는 산천어, 버들치가 노닌다. 상류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작은 누각이 나무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숨바꼭질하며 한 폭의 산수화를 완성한다.

언덕을 조금 오르면 운치 있는 남도 돌담길이 굽이굽이 이어진다. 임권택 감독 영화 ‘서편제’에서 주인공 송화(오정해)가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걷는 장면에 등장하는 돌담길에서 영감을 얻었는데 ‘한의 정서’가 제대로 느껴진다. 돌담을 돌아 나가면 민초들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던 농작물이 펼쳐진다. 벼, 가지, 고추, 파, 참외, 수박, 옥수수와 양평의 대표 작물 부추도 심어졌다. 나팔꽃과 비슷한 메꽃도 만난다. 이곳에는 예전부터 예쁜 메꽃이 덩어리지며 흐드러지게 피던 곳이라 메덩골이란 이름을 얻었다. 메꽃은 뿌리가 생고구마 맛이 나고 전분이 풍부해 보릿고개를 넘기는 구황식물로 쓰였다. 비타민과 무기질이 풍부해 이뇨, 강장, 피로해소 기능도 뛰어나 약재로도 사용됐다.


◆선비의 풍류 맛보다
예쁜 목화꽃 감상하며 제월문(霽月門)을 지나면 ‘선비들의 풍류’ 정원에 닿는다. 제월문은 ‘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로 나타난 맑은 달’이란 뜻이니 입구부터 선비의 풍류가 진하게 다가온다. 조선시대 선비 운곡 원천석의 시구에서 따왔다. 그는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끝까지 출사하지 않고 충절을 지킨 두문동 은거 고려 유신 72인 중 한 명이다. 태종(이방원)을 왕자 시절 가르친 스승인 운곡은 태종이 자신을 등용하기 위해 집에 찾아오자 강원 원주 치악산으로 숨어들었고 왕조 교체기의 역사를 1000수가 넘는 시에 담은 문집 운곡시사(耘谷詩史)를 남겼다.



정원 가운데 작은 한옥이 파청헌이다. 기둥마다 16개 주련이 적혀 있는데 모두 운곡의 시다. 그중 술잔을 잡고 푸른 산을 대한다는 ‘파주대청산(把酒對靑山)’에서 한옥 이름을 따왔다. 류재용 메덩골정원 대표는 “메덩골정원은 천년 이상 이어질 한국의 정원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만큼 깊이를 담고자 노력했습니다. 일본이나 중국의 영향을 느낄 수 없도록, 오롯이 한국 고유의 문화만을 정원 곳곳에 녹여냈습니다. 현판과 주련의 글도 사색당파에 휘말리지 않은 순수한 풍류 시인, 운곡 선생의 시문으로 구성했습니다”라고 전했다. 마당의 작은 연못은 함소연. 만물의 생명이 소생한다는 뜻으로 메덩내의 물은 이곳을 돌아 다시 메덩내로 흐른다. 툇마루에 앉으니 자연에 파묻혀 유유자적하며 후학을 가르치는 데 전념하던 선비들의 풍류가 느껴진다.



문인석이 꾸미는 길을 지나면 프랑스 정원가 기욤이 미래로 뻗어 나가는 한국의 기상을 표현한 무영원을 만난다. 널빤지 모양 돌들이 사방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것처럼 세로로 세워 화단을 꾸몄고 가운데 둥근 수조에는 먹물을 담았다. 무영원은 ‘그림자가 없는 동산’이라는 뜻으로 그림자는 어두운 과거를 상징한다. 화단은 은쑥 등 토종 초화류로 꾸몄다.




토석담과 기와담으로 꾸민 시골의 작은 골목길 ‘고샅’을 지나면 길 입구에서는 보이지 않던 비밀의 공간이 드러나며 탄성이 터진다. 메덩골정원에 가장 아름다운 연못, 용반연이다. 이름은 영웅이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용반기연(龍返其淵)’에서 따왔고 합격, 재물과 부귀, 번영의 상징인 상서로운 두꺼비를 닮은 거대한 바위 서섬암을 놓았다. 경북 경주 독락당을 재해석한 정자 영현당과 ‘달빛이 빛나는 누각’ 섬휘루까지 어우러져 한국정원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발산한다. 청유원과 무애문을 지나면 너른 마당에 소나무 하나 자라는 거대한 바위 원주암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곳은 영현당의 반대쪽 공간인 예술을 담은 정원, 재예당. 나무와 돌, 정자 한 개씩으로 꾸며 ‘여백의 미’를 제대로 보여준다.

◆병산서원의 모던한 재해석
마지막 공간은 ‘한국인의 정신’ 정원이다. 한국인의 사상 기저에 영향을 준 성리학, 불교, 샤머니즘을 모티브로 삼았는데 경주 삼릉숲을 표현한 경주솔밭과 유생 돌정원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진다. 자세히 보니 경주솔밭에는 포석정 같은 물길이 놓였다. ‘문파샘길’로 경주 최부잣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널리 퍼져나가라는 뜻을 담았다. 최부잣집의 마지막 세대인 최준 선생의 호가 문파. 그는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영남대학교 설립의 초석을 닦은 인물이다.



돌 정원 너머로 보이는 모던한 건물이 한국정원의 백미, 선곡서원이다. 맑은 날이면 하얀색 건물이 그대로 연못에 담겨 환상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정중앙 강학당과 유생들의 주거 공간인 동재와 서재로 구성된 병산서원의 건물 배치를 따르면서도 모더니즘을 극대화한 디자인에 감탄이 쏟아진다. 병산서원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류성룡 선생을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설립된 사액서원. 제를 올리는 사당은 보통 강학당 뒤쪽에 위치하는데 선곡서원은 앞마당에 높은 ‘독락의 탑’을 세웠고 그 안에 향을 피울 수 있는 사당을 만들었다. 돌정원 가운데 큰 바위가 류성룡 선생을 뜻하고 작은 돌은 제자들이다. 선곡서원은 카페로 사용된다.


메덩골정원 설립자는 니체 철학의 핵심 개념인 위버멘쉬(Übermensch), 즉 초인(超人)의 개념을 정원 설계에 녹였다. 류 대표는 “니체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초인은 단순히 강한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도덕과 가치를 초월해 끊임없이 자신을 극복하며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인간을 말한다”며 “한국정원의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담겼다”고 설명한다.

내년에 공개될 현대정원의 레스토랑 건물인 ‘위버하우스’도 이런 철학을 잘 담았다. 칠레 페소, 소피아 부부가 설계했는데 위버하우스 옥상 ‘파노라마 테라스’에 오르자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솟아오른 16개의 녹색 기둥이 시선을 압도한다. 초록의 자연과 초인의 이미지를 잘 담은 것 같다. 난간으로 가까이 다가서면 공사 중인 현대정원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약 1만5000평 부지에 그리스인 조르바, 어린왕자 등을 모티브로 꾸며진다니 현대정원까지 더해진 메덩골정원의 완성된 풍경이 벌써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