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으로 바위치기. 불가능하고 무모해 보이며 도저히 승산이 없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탁구 스타 출신인 유승민(43) 대한체육회 회장의 인생이 그런 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4 아테네(그리스) 올림픽 탁구 남자 단식 결승이다. 상대는 당시 세계 최강이던 중국의 왕하오. 유승민은 아테네 올림픽 결승 전까지 6전6패를 안겨준 무시무시한 적수를 만났지만 게임 스코어 4-2로 승리하며 금메달을 따냈다. 탁구 인생 내내 왕하오와 맞붙어 2승18패로 절대 열세였던 그가 겨우 건진 2승 중 1승이 가장 중요한 올림픽 무대에서 나온 것이다.
그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에 도전한 2016 리우(브라질) 올림픽 때도 ‘과연 될까’ 하는 걱정의 시선이 많았다. 그러나 유승민은 그 어려운 걸 해냈다.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하루 3만보를 걸으며 세계 각국 선수들을 만나 왜 IOC 선수위원이 되려는지 진정성 있게 설득하고 지지를 호소한 결과다. 그렇게 IOC 선수위원에 선출돼 8년 임기를 마친 유승민은 올 초 치러진 제42대 대한체육회장 선거에 출마하며 다시 한 번 돈키호테의 길에 나섰다.
선거 직전까지만 해도 ‘어회흥’(어차피 회장은 이기흥)이라는 말이 돌 만큼 이기흥 당시 대한체육회장의 3연임이 유력했다. 그러나 유승민은 개의치 않고 승부사 기질을 발휘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유승민’이란 이름값에 기대기보다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대한체육회 개혁의 필요성을 부르짖었다. 이에 유권자인 체육인 상당수가 호응하면서 결국 이 후보를 38표 차로 제치고 당선됐다. 지난 2월 말 취임해 눈코 뜰 새 없는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유승민 회장을 지난 11일 서울 송파구 방이동의 올림픽회관 집무실에서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제42대 대한체육회장으로 취임한 지 100일이 좀 넘었는데 소회가 어떤가.
“취임 전부터 가장 강조했던 게 대한체육회 내의 사기 진작이었다. 내부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노력을 많이 했고, 인사부터 내부 구조까지 어느 정도 바꾸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갈 길은 멀다. 체육회 구조상 회장이 바뀌었다고 갑자기 드라마틱하게 바뀌거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당장 올해 사업만 해도 (전임 집행부가) 지난해 세워 놓은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변 기대와 달리 개혁이나 변화 속도가 좀 느려 보일 수 있지만 내 권한으로 할 수 있는 선에서는 선거 공약을 거의 다 지켰다. 스포츠공정위원회를 새로 꾸려 독립적인 감시기구로 재탄생시켰고, 대한체육회장이 3연임을 하지 못하도록 정관도 개정했다. (충북) 진천 국가대표 선수촌 분위기도 변화를 많이 줬고, 17개 시·도를 돌면서 68개 경기단체 간담회를 통해 지도자와 학부형, 선수들을 만나 소통했다. 정말 눈 깜빡하니 100일이 지난 느낌이다.”
유 위원장은 이 기간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과 커스티 코번트리 (차기)IOC 위원장 당선인도 만나 2036년 전주 하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지지를 당부하기도 했다.

―체육회 주요 보직에 여성들을 중용한 것도 눈길을 끈다.
“IOC 선수위원을 하면서 양성 평등에 대한 중요성을 많이 느껴 사무총장 자리에 체육회 105년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김나미 전 국제바이애슬론연맹 부회장)을 발탁했다. 부장급 이상 간부 인사에서도 김보영 신임 기획조정본부장 등 여성 13명을 중용했다. 체육회 내 여성위원회도 이번 조직 개편에서 성평등위원회로 이름을 바꾸고 기능을 강화했다. 그 전까지 체육회 간부 중 여성 비율은 10% 미만이었는데 지금은 35~40%는 될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여성을 우대하는 게 아니고 성별과 무관하게 능력에 따라 일을 맡기겠다는 뜻이다.”
―대선 당시 체육회가 8대 과제를 선정해 여야 대선 후보에게 정책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재명 대통령의 체육 관련 공약은 어떻게 보나.
“체육인 복지 관련해선 저희도 공감하는 부분이고,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체육인의 일자리 창출이나 엘리트 체육 및 생활체육에 대한 인프라 확충은 체육회와 정부는 물론 국민 모두가 동의하는 부분이다. 스포츠 활동을 할 수 있는 ‘스포츠권’의 확산에 체육회가 적극 동참하는 것을 넘어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체육회는 대선 당시 △국민이 행복한 스포츠 △건강한 학교 체육 △차세대 스포츠 인재 육성 체계 전환 △유망주 성장 지원 △선수·지도자의 안정적인 삶 지원 △체육 생태계 지속을 위한 스포츠 법·제도 개혁 등 8대 정책 과제를 제시한 바 있다.

―이들 과제 중 임기 동안 꼭 이루고 싶은 거나 바람이 있다면.
“국민들이 일상에서 체육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인프라 확충이다. 우리나라는 국제대회 성적이나 시스템, 스포츠 외교력, 대형 스포츠 이벤트 유치, 생활체육 저변 등에 비춰 스포츠 강국으로 볼 수 있지만 관련 인프라가 선진국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 특히 심각한 위기에 놓인 학교 체육을 활성화하는 게 중요하다. 저출생 현상으로 각급 학교 운동부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학교 체육이 쇠퇴하면 엘리트 선수 수급이 끊기고, 종목별 단체는 문을 닫아야 한다. 그리 되면 경기력이 생활 체육 수준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대로 가다간 스포츠 강국의 지위는 물론 국내 스포츠 생태계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체육인에 대한 인식이 박한 우리 사회의 인식 변화도 시급하다. ‘엘리트 선수도 은퇴하면 할 게 없다’라는 이상한 인식 대신 스포츠 선진국처럼 ‘스포츠인들이 우리 사회의 한 축이고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훌륭한 인적 자원’이란 인식이 확산됐으면 한다. 그러면 학부모들도 자녀를 운동시키는 데 덜 주저할 것 같다. 이런 인식을 토대로 체육 정책이 짜여지고, 엘리트·생활 체육 할 것 없이 국민 모두가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이 됐으면 한다.”
―체육회장 선거 때부터 체육회의 ‘자립성’과 ‘자율성’을 강조해왔는데,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성과가 어떤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규제들 탓에 후원금 모금 등 자립 기반을 마련하는 데 한계가 많다. ‘체육회장이 직접 찾아온 건 처음’이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기존 후원업체들을 일일이 찾아가 후원 확대를 요청하고 새 후원사 발굴에도 힘썼다. 하지만 체육회가 국가계약법을 따라야 하는 공공기관이다 보니 후원 받으려면 공공 입찰과 경쟁을 거쳐야 한다. 이처럼 후원 규정이 까다롭고 절차가 복잡하니 후원 의사를 밝힌 기업들도 손사래를 치기 일쑤다. 체육회의 배를 불리겠다는 게 아니라 국가대표와 유소년 체육 지원 등 체육계 발전을 위해 필요한 자금을 끌어모으려 해도 안 되는 구조다. 체육회가 공공기관별 특성과 상관없이 경직되고 현실과 동떨어진 규정 탓에 제 역할을 못하는 건 문제라고 본다. 후원금을 투명하게 받고 적절하게 집행하도록 하는 장치를 두면 되지 않나.”

―스포츠개혁 TF팀을 운영하고 있는데 주요 개혁안을 소개한다면.
“체육인들의 자격과 관련한 제도를 만들고 있다. 국기원이 태권도 단증을 발급하듯 체육회가 공인하는 이른바 ‘스포츠 외교관’을 육성해 다른 나라 국가올림픽위원회(NOC)에 파견하고, 국제기구에서도 일할 수 있도록 해보려 한다. 체육회가 스포츠 외교관 면허증을 발급하는 과정에서 자체 수익구조도 창출하고, 수익을 인재육성에 재투자하는 등의 선순환 효과가 났으면 한다. 체육회 선거 제도 개편도 추진 중이다. 회장 선거를 직선제로 바꾸고, 지방체육회나 종목단체 선거도 바꿔보려고 한다. 현재는 대의원에 의한 간접선거를 하다 보니 현장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하기 어렵다. 직선제를 통해 투표율을 높이고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하려 한다.”
―2018년 스웨덴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 단체전에서 남·북한이 단일팀을 꾸려 동메달 따게 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바 있다. 지금 경색된 남북 관계를 보면 누구보다 마음이 아플 듯한데.
“정말 안타깝다. 남·북한 교류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무궁무진한 분야가 스포츠다. 양국 정부가 ‘스포츠만큼은 민간 차원에서 언제든 자유롭게 교류하도록 내버려 두자’는 약속을 하면 좋겠다. 남북 체육 교류는 장기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양국 스포츠 발전에도 도움되기 때문이다. 단기적인 체육 행사는 예산·에너지 소모가 큰 반면 보여주기용 정치적 이벤트밖에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아무튼 남북 교류 문제는 정부 정책 방향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체육회가 새 정부와 함께 노력해서 장기적이고 발전적인 남북 체육 교류 여건이 조성되길 기대한다.”

―체육회장 이전에 국가대표 선배로서 요즘 젊은 후배 선수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게 뭔가.
“자기 의사 표현도 똑부러지게 하고 더 당당해졌으면 좋겠다. 우리 선수들은 그 정도의 대접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부모님과 코치나 트레이너 등 지원 그룹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분들의 지원이 당연한 게 아니라 고마운 일이라는 걸 알아야 자기가 뛰고 있는 무대가 매우 소중하게 느껴져 최선을 다하게 된다. 갈수록 개인주의화가 심하지만 우리 선수들은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따듯한 사람이 됐으면 한다.”
유승민 대한체육회장은…
●1982년 인천 출생 ●부천 내동중 ●포천 동남고 ●경기대 예술체육대학 체육학 학사·경기대 사회체육학 석사·사회체육학 명예 박사 ●2004 아테네 올림픽 남자 단식 금메달 ●2008 베이징 올림픽 남자 단체전 동메달 ●2012 런던 올림픽 남자 단체전 은메달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2016년 8월∼2024년 8월) ●2018 평창기념재단 이사장 ●대한탁구협회장(2019년 5월∼2024년 9월) ●대한체육회장(2025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