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그 매혹의 정치 - 현대적 주체성의 구성과 한국 대중영화 1919∼1979/ 김청강/ 책과함께/ 3만3000원
한국의 대중영화가 근현대 대중과 어떠한 영향을 주고받으며 형성되어 왔는지 살펴본다. 20세기 초반부터 1970년대까지 ‘매혹’과 ‘선전성’이 강한 영화들을 중심으로 영화와 국가 통치성 사이를 추적한다.
‘매혹’이 자본주의 방식으로 관객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거나 창출하는 것이었다면, ‘선전’은 이를 통해 국가가 국민에게 전달하는 메시지였다. 영화는 대중을 유혹하면서도 ‘국민화’에 복무했다. 또한 인기 있는 대중문화라면 그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차용하여 영화의 일부로 만들었다. 연극, 악극, 무대, 쇼, 무용, 대중소설, 수필, 외국 영화, 라디오 드라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주목받았던 요소들을 가져다 썼다.


한국의 이러한 영화 문화는 식민 지배와 박정희 독재라는 폭압적인 체제 안에서 약 반세기를 지속했다. 관객을 매혹하던 영화가 국가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자율적으로 성장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가난했던 제3세계 국가이자 식민주의, 전쟁, 독재와 같은 정치체제 아래에서 생산될 수밖에 없었던 한국 영화의 조건은 이 ‘매혹’에 덧붙여진 선전과 정치적 메시지를 만나게 하는 배경이 됐다. 책은 한국의 역사와 영화의 역사가 겹치는 순간, 영화가 어떻게 대중과 조우하며 어떠한 정치를 만들어냈는지를 탐구한다.
1919년 조선영화가 출현했으나 일제 통치 상황에서 식민정치가 개입되지 않은 영화는 없었다. 일제의 자본과 기술, 인력과의 긴밀한 관계 혹은 간섭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영화계의 담론은 ‘국가’ 중심의 영화 제작으로 모아졌다. 식민지하 일제의 제국주의 선전 영화는 그대로 반공영화에 전유되어, 대한민국의 ‘반공 국민화’에 기여했다. 이승만의 하수인 역할을 자처했던 정치 깡패 임화수가 설립한 ‘한국연예주식회사’는 인기 코미디언을 통한 ‘반공-엔터테인먼트’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행보는 일제하 선전영화가 ‘신민화’에 기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반공적 국민화라는 이데올로기에 영화가 이바지했던 역사를 되풀이한 것이다.

남한 영화는 뉴스영화, 문화영화, 극영화의 형태로 분화·발전했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한 물자 부족, 박정희 정권의 군사 독재 등을 거치면서 자유로운 형태의 제작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남한의 영화는 극영화라 할지라도 국가가 제시하는 ‘우수영화’의 기준에 맞추어 제작함으로써 자본을 조달해야 했고, 국가가 정한 검열의 기준 안에 들고자 일정한 ‘교육과 계몽’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 같은 조건 속에서 탄생한 수많은 조선 영화나 한국 영화는 즐거움을 소비하는 관객의 욕망을 충족시키면서도, 이와 함께 영화 중간에 정치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전달하는 구도를 오랫동안 유지했다.
지금은 영화 상영 전 상품 광고에 익숙하지만, 한동안 한국에서는 영화 상영 앞뒤에 붙은 ‘대한뉴스’나 문화영화를 봐야 했다. 대중이 원하던 ‘매혹’의 끝에 ‘선전’이 자리하는 ‘산만한’ 관람 형태는 한국 관객에게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영화계에서는 ‘할리우드 따라하기’가 유행했다. 책은 식민지 악극 무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세대가 어떻게 새로운 ‘미국적’ 세대 혹은 문화로 교체되며 관객을 매혹했는지도 들여다본다. ‘식민지 과거 문화’를 떠올리게 하는 ‘신파’ 영화들은 부인되고, ‘냉전’의 맥락에서 재활성화되기 쉬운 ‘밝고 즐거운’ 악극 공연들이 선택적으로 영화화된다. 당대 최고 스타 김시스터즈가 등장하는 ‘청춘쌍곡선’, ‘오부자’ 등의 영화들이 이러한 변화를 담고 있다. 이 영화들은 카메라의 ‘쇼맨십’을 과장되게 보여주며 관객을 끌어들였다. 동시에 과거 식민지 악극의 아이콘을 냉전적 상황으로 차용, 변형함으로써 풍요롭고 행복한 미국처럼 한국의 모습을 부풀려 그려냈다. 그러나 이 같은 ‘할리우드화’된 영화들 또한 한국의 현실을 봉합할 수 없었다. 전쟁과 가난이 휩쓸었던 한국의 모습이 그대로 돌출되기도 했다.
1970년대는 유신과 긴급조치 발동에 따라 법적 ‘예외상태’가 상례화된 시기였다. 텔레비전 보급에 의해 영화 관객이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1972년 박정희 정부의 유신 선포 이후 국가는 ‘국책영화’라는 이름으로 선전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국책영화들은 국가 주변부 인물들을 규율하여 ‘적합한 국민’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국가의 균등 발전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고자 시작된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새마을 영화’는 주변부 위치에 있던 여성, 어린이를 적극적으로 국가 안으로 호출하여 마을을 이끄는 지도자 격으로 위상을 격상시켰다. 영화 ‘아내들의 행진’과 ‘수녀’는 도시의 교육이 어떻게 농촌의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깨우고 주변부 사람을 중심인물로 만들려고 했는지 예시한다. 흥미롭게도 대다수 영화들이 남성을 마을과 국가의 지도자로 묘사했던 것과 달리 이 영화들에서 여성은 마을을 ‘대통합’하는 산업의 역군이자 지도자로 나온다. 죽어서라도 자신을 희생한 여성, 말을 할 수 없는 ‘벙어리’로 멸시받던 여성이 마을을 발전시키고 ‘계몽’한다.
그러나 영화 속 국가의 지나친 선전은 오히려 영화의 설득력과 개연성을 잃게 만들고, ‘국책’의 메시지마저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유신시대의 ‘말더듬이’ 영화를 생산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