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錢)국구’라는 용어를 들은 적이 있다면 당신은 50대 이상 구세대일 공산이 크다. 지역에서 뽑는 국회의원이 아니라 당에서 선정하는 ‘전국구 의원’은 2000년 16대 총선때부터 비례대표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전까지만해도 국회의원 후보를 선정하는 공천 작업이 당 대표와 그 측근 세력에 의해 좌우됐는데 특히 전국구가 그랬다. 선거로 뽑히는 의원직이 아니다보니 당 대표 입김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앞 순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수억, 수십억원의 공천 헌금을 써야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전(全)국구’가 아닌 ‘전(錢)국구’로 불린 것이다. 물론 모든 전국구 의원이 그랬다는 건 아니다. 당 대표나 당에서도 할 말은 있었다. 총선을 한 번 치르려면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니 ‘특별당비’를 걷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비례대표로 제도가 바뀌면서 ‘공천헌금’ 논란은 사라졌지만 후보들의 자질 논란은 심심치 않게 제기됐다. 하지만 22대 총선처럼 제도를 없애야하는 것 아니냐는 여론이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이번 총선에서는 사표를 줄이고 정치적 다양성, 전문성을 강화한다는 취지가 퇴색하면서 비례대표 무용론마저 나오고 있다. 본래 취지 무색해진 비례대표제… ‘방탄 금배지’ 전락 위기(3월9일자·김승환·유지혜 기자) ‘커지는 ‘종북 숙주론’에 민주당 비례1번 재추천 검토’(3월12일자·김승환·조병욱 기자) 기사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낳은 공천 파행을 담고 있다. 거대 여야 정당의 비례 위성정당에 친북·반미 성향이 뚜렷한 인사나 범법 이력이 있는 인사들이 몰려들고 있는 행태를 지적한 것이다. 비례대표가 국민의 대표가 아니라 ‘특정 정파’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국회 진출 발판으로 악용되고 있는 셈이다.

◆말많고 탈많은 비례 공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장고 끝에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유지를 정하면서 21대 총선에 이어 이번 총선에서도 ‘위성정당’이 등장했다. 국민의힘은 ‘국민의미래’, 민주당은 ‘더불어민주연합’을 만들어 소수정당들과 함께 비례대표 의석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문제는 민주당 주도의 비례 위성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이 진보당에 3석을 당선권에 배정하면서 ‘내란음모사건’으로 해산된 통진당과 관련된 인사들의 국회 입성이 가능해진 것이다. 통진당 후신인 진보당은 강령에서 한·미동맹 해체를 주장하고 있다.
용혜인 의원은 3석을 배정받은 새진보연합 몫으로 비례대표로 나서 두 차례 연속 민주당 위성정당을 통한 국회 진입 수순을 밟게 됐다. 새진보연합은 용 의원이 주도한 당이어서 ‘셀프 공천’ 꼬리표를 달았다. 4석을 배정받은 시민사회 쪽에서도 한미연합훈련 반대 시위, 사드배치 반대 시위 등을 주도한 인사들을 내세웠다가 사실상 진보당의 ‘위장 공천’이라는 비판에 밀려 주저앉혔다. 전 군인권센터 소장인 임태훈씨는 민주당쪽에서 병역기피 문제로 공천 추천 철회를 요청해 시민사회 측과 충돌을 빚었다.

국민의힘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는 후보 선정은 미뤄놓고 일단 ‘의원 꿔주기’부터 나섰다. 총선 투표지에 기재되는 국민의미래 기호 순번을 앞 순위로 만들려고 잘못한 일도 없는 비례대표 의원 8명을 제명, 출당시키기로 한 것이다. 전신인 미래통합당도 지난 총선때 의원 6명을 위성정당에 꿔준 적이 있다. 500명이 넘는 공천신청자를 대상으로 3일간 면접을 통해 후보가 결정되는 만큼 졸속 검증이 이뤄질 우려도 높다.
◆조국신당, ‘제2의 안철수신당’될까
한 표라도 더 얻으면 당선되는 소선거구제에서 제3당이 지역구 의원을 만들어내는 건 쉽지않다. 그래서 정당 득표를 많이 얻어야 ‘돌풍’을 만들어낼 수 있다. 2016년 민주당을 제치고 정당득표율에서 2위(26.7%)를 차지해 13석을 얻은 안철수 대표의 국민의당이 대표적 사례다. 앞서 한나라당 공천 탈락자들로 이뤄진 ‘친박연대’가 비례대표 8석을 얻어 ‘살아 돌아오라’는 당시 박근혜 전 대표의 위력을 실감케하기도 했다.

조국 전 법무장관이 깃발을 든 조국혁신당이 각종 여론조사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22대 총선의 최대 변수가 되고 있다. 15일 발표된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조국혁신당은 정당 지지도 7%를 기록했다. 한국갤럽은 “민주당 지지자 셋 중 한 명은 투표 의향 비례대표 정당으로 조국혁신당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입시 비리 등으로 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조 전 장관,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황운하 의원 등의 ‘방탄용 정당’ 아니냐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지민비조’(지역구는 민주당, 비례는 조국당) 바람을 타고 있는 것이다.
‘반윤석열, 반한동훈’ 색채를 분명히 하면서 야권 성향 지지자를 끌어모은 조국당이 실제 득표로 연결시킬 수 있을지는 두고봐야한다. 안철수의 국민의당, 박 전대표가 뒷배경이 된 친박연대가 성공한 데는 호남, 대구·경북 지역의 적극적 지지가 뒷받침됐다. 현재 호남에서는 민주당과 조국당, 이낙연 공동대표의 새로운미래가 경쟁하고 있다. 선거 운동이 본격화하면서 거대 양당 결집력이 높아질 수 있는 만큼 조국당을 비롯해 제3당 입지는 좁아질 수도 있다. 21대 총선에서도 열린민주당이 한국갤럽 비례정당 조사에 9%를 기록했는데 정작 투표 당일에는 5.4%를 얻는데 그쳤다.

◆비례대표가 뭐길래
비례대표가 등장한 건 1963년 6대 총선에서다. 전국구로 불렸다. 비례대표로 이름을 바꾼 것은 2000년 16대 총선때다. 지금의 지역구 1표, 정당투표 1표를 찍는 정당명부식 1인2표제가 실시된 것은 2004년 17대 총선때다. 정당득표율 3%를 넘는 모든 정당이 득표율에 따라 비례대표 의석을 받게 됐다. 이른바 ‘3% 봉쇄조항’이다. 21대 국회에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민주당 주도로 통과됐지만 소수정당의 원내 진출이라는 당초 명분과는 달리 여야 모두 위성정당을 만들면서 사실상 무력화됐다.

비례대표제는 국회 전문성, 다양성, 직능 대표성 등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제도다. 여성, 장애인, 다문화가정, 각종 직능 단체 등을 대표하는 인사들이 진출하는 토대가 됐다.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환경에 따라 성장 정도가 달라지는 물고기 ‘코이’를 빗대 장애인 정책 개선을 요구한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은 연단에서 “저는 장애인 당사자이자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비례대표 의원”이라고 소개했다. 19대 총선에선 첫 이주민 출신 이자스민 국회의원이 탄생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각 정당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거나 ‘스피커’ 역할을 한 사람을 비례대표로 발탁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민주당 비례 위성정당을 통해 국회 입성한 최강욱 전 의원, 윤미향 의원, 김의겸 의원 등이 대표적이다. 조태용 국정원장, 신원식 국방부장관, 조수진 의원 등도 모두 국민의힘 전신인 미래통합당 비례 위성정당을 통해 21대 국회의원으로 입성했다.
황정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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