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두 시간짜리 영화에 인생 전부 걸었죠”

올 부국제 개막작 ‘어쩔수가없다’
朴, 부산서 각본 집필… 亞 첫 공개
이병헌·손예진·박희순 등 출연
집착 탓에 인간의 타락 과정 그려

파나히 감독, 亞영화인상 수상

아름다운 아내, 두 아이, 두 마리 개. 어렵게 장만한 전원주택에 애써 가꾼 장원과 온실까지. 25년 경력 제지 전문가 만수(이병헌)의 삶은 더 바랄 게 없이 완벽했다. 평생을 바친 회사로부터 느닷없는 해고 통보를 받기 전까지는.

 

재취업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고, 그간 유지해온 생활 수준은 더는 영위하기 힘들어졌다. 벼랑 끝에 내몰린 만수는 자신처럼 해고된, 하지만 자신보다 더 뛰어난 경쟁자가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기이한 방식으로 이 상황을 타개하기로 한다. 그는 유령 회사를 꾸며 구인 광고를 낸다. 이력서를 받아 경쟁 제지 전문가들의 신상정보를 파악한 뒤, 그들을 한 명씩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

17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작 ‘어쩔수가없다’ 기자간담회에서 박찬욱 감독(왼쪽부터), 배우 이병헌, 손예진, 박희순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부산=뉴시스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17일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를 개막작으로 아시아 최대 영화 축제를 여는 축포를 쏘아올렸다. ‘어쩔수가없다’는 베니스국제영화제와 토론토국제영화제를 거쳐 이날 아시아 최초로 공개됐다. 박 감독의 영화가 BIFF 개막작으로 선정된 건 이번이 처음. 이날 주연배우 이병헌, 손예진, 박희순, 이성민, 염혜란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박 감독은 “이번 영화 각본을 쓸 때 부산에서 시간을 보냈다”며 “바다와 복잡한 도시 등 영화에 필요한 풍경을 모두 갖춘 부산은 머무르기에도, 영화 만들기에도 최고의 도시”라고 말했다.

 

이번 작품에는 이경미 감독이 각본에 참여하고, 조영욱 음악감독, 류성희 미술감독 등이 함께했다. 박가언 BIFF 수석프로그래머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당대 최고의 영화인들이 모여 완성한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특히 영화 속 만수의 집은 단순한 배경을 넘어 하나의 캐릭터로 중요하게 그려진다. 만수가 그토록 애정을 쏟는 집의 의미를 담기 위해 제작진은 오랜 시간 촬영지를 물색했고, 마침내 선정된 집은 미술팀이 대폭 개조했다. 박 감독은 “집 외벽에 물결처럼 두른 콘크리트 구조물, 정원과 온실 모두 새롭게 꾸몄다”며 “이번 영화의 시각적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집”이라고 강조했다.

 

영화는 가족을 지키고, 사랑하는 직업에 종사하겠다는 한 남자의 집착이 도덕적 타락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다룬다. 제지업 장인인 만수 그리고 만수와 닮은 그의 경쟁자들의 처지는 기술 발전을 직면한 인간의 운명에 대한 은유로도 읽힌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인공지능(AI) 기술의 발전을 대면한 작은 인간의 모습을 그리기도 한다.

 

박 감독은 1990년대에 출간된 이 영화의 원작 소설 ‘액스(도끼)’(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지음)가 동시대 한국에도 유효하며,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종이 만드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인생 자체일 수 있듯, 나 역시 어찌 보면 현실에 큰 도움을 주지도 않고 두 시간짜리 오락거리일 뿐인 영화에 인생 전부를 걸었다”며 영화화의 배경을 설명했다.

 

17일부터 26일까지 열흘 동안 부산 영화의전당 일대에서 열리는 올해 BIFF에선 64개국 328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감독 숀 베이커, 마이클 만, 기예르모 델 토로, 두기봉, 배우 밀라 요보비치, 쥘리에트 비노슈, 서기 등 세계적인 스타 영화인들도 줄줄이 부산을 찾는다. 이날 이병헌의 단독 사회로 진행된 개막식에서는 올해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자인 이란의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아시아영화인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