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브란트의 무릎 꿇기로 끝난 게 아니다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유럽의 국제질서를 재건하기 위한 미국·영국·소련(현 러시아) 3대 열강의 얄타 회의는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열렸다. 이 기간 총 8차례의 전체 회합이 있었고 폴란드 문제가 의제로 오른 것이 7차례였다. 사실상 회의 내내 ‘폴란드를 어떻게 해야 하나’를 놓고 고심한 셈이다. 이른바 ‘3거두’로 불린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폴란드에 관해 발언한 내용은 회의록에 기록된 것만 1만8000단어나 된다고 한다. 미국·영국은 폴란드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남길 원했고, 소련은 공산주의 블록의 일원이 되길 희망했으니 양측의 충돌은 당연한 일이었다.

1970년 12월 폴란드를 방문한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가 나치 독일에 희생된 폴란드인의 묘지에 헌화한 뒤 무릎을 꿇은 채 참회하고 있다. SNS 캡처

2차대전이 끝나가며 소련은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동유럽을 자국 영향권에 편입시켰다. 미국과 영국에겐 공산주의 팽창을 막을 힘이 없었다. 결국 폴란드는 소련 위성국이 됨과 동시에 공산화의 길을 걸었다. 2차대전은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한 만큼 패전국인 독일이 폴란드에 배상금을 무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전쟁의 결과 독일은 동서로 분단됐다. 공산주의 동독은 소련의 비호 아래 폴란드에 대한 배상 책임을 면제 받았다. 동독과 별개로 서독은 1970년대 폴란드에 거액의 차관을 제공함과 동시에 전시 강제 노역에 동원된 폴란드인 48만명한테 개별 보상금도 지급했다. 폴란드와 동·서독 간의 과거사 문제는 이렇게 어정쩡한 상태에서 일단락됐다.

 

1990년 통일 이후 옛 동독의 모든 권리·의무를 승계한 독일은 1953년 동독과 폴란드 간에 체결된 ‘면제 협정’을 들어 양국 간에 더는 배상 문제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이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폴란드는 2010년대 들어 강한 민족주의 성향의 법과정의당(PiS)이 집권하며 태도가 바뀌었다. 올해 들어 PiS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어 당선된 카롤 나브로츠키 폴란드 대통령은 독일 정부에 무려 1조3000억유로(약 2120조원) 규모의 배상금 청구서를 내밀었다. “1953년 면제 협정은 소련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것으로 무효”라며 “독일은 2차대전 당시 폴란드와 폴란드 국민의 피해를 제대로 배상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었다.

16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을 방문한 카롤 나브로츠키 폴란드 대통령(왼쪽)이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16일 취임 후 처음 베를린을 방문한 나브로츠키 대통령을 향해 독일 정부는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폴란드의 안전을 지키는 데 충분한 군사적·재정적 기여를 하겠다”고 밝혔다. 배상금 지급을 안보 지원으로 갈음하자는 얘기다. 하지만 폴란드 정부는 “전후 몇 년이 지났든 배상금을 끈질기게 요구해야 한다”는 입장이 확고하다. 1970년 12월 폴란드를 방문한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는 나치 독일에 희생된 폴란드인 묘지를 참배했다. 겨울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 속에서도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고 한참 동안 참회했다. 오늘날 한국인들은 이 장면을 거론하며 “진정성 있는 사죄”라고 칭송한다. 하지만 그건 그렇게 보고자 하는 한국인의 바람이 투영된 해석일 뿐 폴란드인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브란트의 무릎 꿇기로 끝난 것이 아니고 독일·폴란드 간 과거사 청산 문제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